구약말씀연재/요나서(JONAH)

[하루말씀] 요나서 4장 (JONAH 4)

매일같은하루 2023. 3. 20.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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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는 생명을 사랑했습니다. 죽음보다 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합니다. 다시스 배의 선원들은 자신들 뿐만 아니라 요나도 살리려 했고 살기 위해 이방인 선지자가 외치는 선포를 적극적으로 수용했습니다.  반면 요나는 삶보다 정의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JONAH4
요나서4장강해

요나서 4장 (JONAH 4)

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5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7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하루말씀]

그래서 풍랑을 만났을 때 자신이 죽어야 풍랑이 멈춘다는 생각에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의미에서 자신이 죽음으로써 악한 니느웨에 하나님의 정의가 심판으로 선포되는 것을 좋은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고통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한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대해서 마음을 돌이키셨다는 사실입니다. 요나는 니느웨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불타는 것을 직접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40일 간 니느웨 주변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40일이 지나도 심판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심판을 내리시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1절,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분내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항의 기도를 드립니다. 2절(표준새번역) "주님,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렇게 될 것이라고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내가 서둘러 다시스로 달아났던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실 것임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기도를 통해 자신이 왜 다시스로 도망했는지 그 이유를 밝힙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용서하실 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요나는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죄인이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니느웨 사람들이라 더욱 화가 났습니다. 사실 선지자는 죄인이 회개하도록 돕는 자이며, 죄인이 죄의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용서 받는 것을 기뻐해야 하는 위치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신 것에 대해 분노합니다.

 

*이런 상황가운데 요나는 하나님의 성품을 아주 잘 묘사하였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은혜로우십니다. 하나님은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일방적으로 사랑을 베푸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자비로우십니다. 이 단어는 어머니의 자궁과 연관된 단어이기 때문에, 아이를 향한 모성적인 사랑과 관심을 뜻합니다.  셋째,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문구를 직역하면 ”긴 코를 가지다“는 뜻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화가 나면 코에서 열이 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므로 코가 길면 그만큼 열을 식힐 수 있는 공간이 많아서 화를 더디 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긴 코를 가진 분으로 묘사한 것은 하나님은 다정하시고 자비가 많은 분이라는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은 매우 인자하신 분이십니다. 인자는 근본적으로 언약을 충실하게 이행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장가 많으시다는 것은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충실하게 지키며 필요에 따라서는 이스라엘의 과오까지도 용서하셔서 언약관계를 유지하시겠다는 주님의 의지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한한 은혜자라 표현합니다. 다섯째, 하나님은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시는 분이십니다. 요나는 이 사실을 지금 니느웨에서 체험합니다. 죄인이 회개만 하면, 계획하신 재앙마저 거두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중에 죄에 대한 심판만큼은 바뀔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꼐서 이미 선언하신 심판을 이행하지 않으셔서 ‘약속을 지키시지 않는 불명예를 안을 수 있지만, 그런 명예훼손을 감수하면서까지 하나님은 죄인이 멸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왜 이러한 하나님을 섬기면서 우리의 삶에서 적용해 나가지 못할까요. 이렇게 되는 이유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인간의 삶을 동떨어지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항상 인간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에도 인간은 자기 중심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뿐이지 인간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계획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나는 다시 한번 죽음을 청합니다. 3절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또 다시 요나가 생명이 있는 삶이 아닌 죽음의 길을 청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4절,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정죄의 말이 아니라 요나로 하여금 지금까지 일을 정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수사학적인 질문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요나의 행동을 문제삼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책망하지 않으시고 다만, 말씀하셨습니다. 요나를 기다려주십니다.

 

요나가 주님이 기다리는 주님 앞을 박차고 일어서서 5절에 니느웨성읍 동쪽으로 가서 초막을 짓고 머뭅니다. 그리고 그늘 아래에 앉아서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지켜보며 고집을 피웁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요나를 가르치시기 위해 요나의 초막 옆으로 박넝쿨이 자라게 하셨고, 하루만에 쭉 자라나서 - 요나를 뜨거운 햇볕에서 보호하게 하셨습니다. (6) 요나는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합니다. 요나가 이토록 기뻐한 이유는 이것을 하나님의 화해의 제스처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나는 다시금 니느웨가 심판당하길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는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가 당할 일을 요나가 당할 미니 심판을 허락하십니다. 새벽에 벌레 한 마리를 풀어놓으시니 그 벌레가 박넝쿨을 갉아먹고 곧 시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해가 다시 뜰 때에 하나님께서는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햇빛에 요나가 혼미해져 또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리이다”(8) 이 정도면 요나의 고질병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합니다. 9절,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그러자 요나가 답합니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새번역) “옳다 뿐이겠습니까? 저는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 매우 한심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사람들의 생명에는 관심이 없고 하찮은 박넝쿨 때문에 죽겠다고 하는 요나에게 반문하십니다. 10절,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다시말해, 너는 박넝쿨을 사랑하기로 선택했지만 나는 사람을 선택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Kennedy) 니느웨는 도시의 규모가 큰 죄악이 가득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니느웨는 하나님이 용서하신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나에게 하나님께서는 질문하셨고 결론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이 속에서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과 자비와 은혜를 발견합니다. 볼드윈이라는 신학자는 하나님의 마지막질문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창조주인 내가 사람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데 인간인 너의 허락을 받아야 되느냐”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만을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구원받지 못한 모든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요나가 할 일은 구원받지 못한 인간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생각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봤습니다.  하나님앞에 우리가 해야 될 일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편에서 일하는 하나님의 선지자여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일하심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 우리로 은혜와 축복이 넘치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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